세계사

아시아의 역사

  • [노부나가 포위망 ③] 반(反)노부나가 세력의 마지막 저항, 1575~1582년

    아사쿠라·아사이 세력은 오랜 세월 노부나가를 괴롭혔으나 결국 멸망했고,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노부나가를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다케다 신겐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 가쓰요리가 가문을 계승했지만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게 참패하면서 다케다 가문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구 다케다 영지마저 오다 씨의 영토로 편입되어가니, 노부나가에게는 더 이상 적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오사카에 근거지를 둔 이시야마 혼간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오사카 이시야마 혼간지혼간지는 제8대 법주 렌뇨 시

  • 오다 노부나가는 '천하포무' 이후 천황과 조정을 어떻게 하려 했는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오랜 역사를 지닌 천황과 조정(궁정)에 대해 과연 어떤 구상을 품고 있었을까요? 정토천황(正親町天皇)의 양위 권고와 삼직(三職) 취임 사양 같은 행보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단순한 권력 장악을 넘어 조정 개혁까지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스로 절대적 권력자가 되어 구체제에 의존하지 않고 강력한 질서로 일본을 통치하려 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초기에는 쇼군의 권위를 활용하려 했다 노부나가의 야망을 실현하려면 당시 최대 권력 세력인 막부와 조정, 이 두 축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구 권위

  • 아케치 미쓰히데는 왜 혼노지의 변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을까?

    1582년 6월 2일, 아케치 미쓰히데(Akechi Mitsuhide)는 교토 혼노지(本能寺)에 머물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Oda Nobunaga)를 급습해 자결로 몰아붙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아는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입니다.전국시대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히는 이 반역 사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수많은 설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아케치 미쓰히데가 혼노지에서 배신을 감행하게 된 동기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겠습니다.혼노지의 변 당시의 정세먼저 사건 발생 당시의 상황부터 짚어보겠습니다.노부나가는 교토의 혼노지에서 다도

  • 헤이안·가마쿠라 시대의 전투는 '일기토'가 기본?! 무사들의 전투 진행 방식 완전 정리

    일본 역사를 들여다보면 수많은 전투가 등장하며, 두 군대가 생사를 건 치열한 대규모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상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의 전투는 의외로 깔끔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그 방법이란 바로 일기토(一騎討ち, 단독 대결)입니다.헤이안 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까지, 일기토가 기본가마쿠라 시대의 무사들은 기마 무사(騎馬武者)였습니다. 무사 곁에는 나기나타(長刀)를 든 아시가루 종자가 따랐으며, 전투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기병 무사였고 종자들은 보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전투는 시아와세(矢合わせ,

  • 센고쿠 다이묘의 군사력은 얼마나 강했을까? 석고와 동원 병력의 비밀

    센고쿠(전국) 시대의 전투 이야기라고 하면 웅장하고 용맹한 장면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1560년의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이끄는 대군을 오다 노부나가가 소수의 병력으로 격파했고,1575년의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철포 부대가 다케다 가문의 자랑이던 기마 군단을 궤멸시켰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병력이 동원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그런데 병사를 움직이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병력 산출의 기본 공식, 1만 석 = 250명일반적으로 센고쿠 다이묘의 동원 가능 병력은 1

  • 토이의 입구(刀伊入寇)란? – 1019년 여진족의 규슈 침공과 그 배경

    10세기에 일어난 조헤이·덴교의 난 외에도, 무사 계급이 점차 성장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1019년에 발생한 토이의 입구(刀伊の入寇)입니다.당시 다자이노 곤노소츠(大宰権帥)였던 후지와라노 다카이에(藤原隆家)의 지휘 아래 규슈의 무사들이 이들을 격퇴했다고 전해집니다.이번 글에서는 토이의 입구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토이란 무엇인가?토이(刀伊)는 주로 고려 사람들이 여진족(女眞族)을 가리키던 명칭입니다. 이 단어가 그대로 일본에서도 사용되게 되었고, 1019년 토이 즉 여진족들이 쓰

  •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영광을 자랑한 후지와라 씨, 그 시작은?

    헤이안 시대 최고의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그가 속한 후지와라 씨의 역사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아스카 시대부터 꾸준히 조정의 무대에 등장해 온 후지와라 씨는 과연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후지와라 씨의 탄생 후지와라 씨의 시조는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입니다. 645년(을사년), 조정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이었던 카마타리는 소가 씨를 타도한 쿠데타, 이른바 을사의 변의 핵심 주역으로 활약했습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임종을 앞둔 덴지 천황(당시 나카노오에 황자)으로부터 669년

  • 오다 노부나가는 왜 거처를 잇달아 옮겼을까? ② 기후성에서 아즈치성까지

    이나바산성 전투에서 숙적이었던 사이토 가문을 마침내 멸망시킨 오다 노부나가. 이후 그는 천하 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한층 빠르게 내딛게 됩니다.이나바야마성 함락 후, 노부나가는 거점을 고마키산에서 이나바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합니다.그리고 성과 성시(城下町)의 이름을 이나바에서 기후(岐阜)로 개명했습니다.이는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이 기산(岐山)에 도읍을 정해 천하를 평정했다는 일화에서 따온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또한 이 무렵부터 노부나가는 천하를 의식하기 시작했으며, 천하부무(天下布武) 인장을 사용하게 됩니다. * 이하 기후성이라 칭합

  • 헤이안 말기, 사무라이가 대거 중용되기 시작한 이유

    백하(白河) 천황, 도바(鳥羽) 천황, 고시라카와(後白河) 천황으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인세이(院政)는 100년 넘게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인세이는 다이라(平)씨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다이라씨가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그 과정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사무라이가 크게 중용되게 된 배경부터 짚어보겠습니다. 지방의 혼란과 사무라이의 대두 헤이안 시대에는 중앙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정치가 혼란해지며 수많은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주요 사건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939

  • 무로마치 막부의 성립부터 멸망까지, 한 번에 정리하는 역사 흐름

    전국시대는 무로마치 시대 말기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와 겹쳐 전개되기 때문에, 무로마치 시대 전체의 흐름이 잘 그려지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무로마치 막부가 성립한 시점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시대순으로 정리했습니다. 일본 중세사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무로마치 막부의 성립과 남북조의 동란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 뒤, 고다이고 천황은 조정(공가) 중심의 정치를 되살리기 위한 새로운 정권, 즉 겐무 신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무사 계급의 큰 반발을 불러일였고, 협력자였던 아시카가 다카

  • 나라 시대의 건축양식(사찰 편) – 당초사부터 정창원까지

    지금까지 아스카 시대와 나라 시대의 정치적 이면을 살펴봤다면, 이번에는 시선을 조금 바꿔 문화적인 측면, 그중에서도 건축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나라 시대의 대표 사찰나라 시대의 건축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역시 사찰입니다.아래 사진은 감진화상(鑒眞和上)으로 널리 알려진 당초사(唐招提寺)입니다.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당초사의 모습입니다.사찰 건축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용어가 바로 승가람마(僧伽藍摩)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람(伽藍)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는 개념으로, 여기서는 사찰 전체 또는 사찰의 주요

  • 나라 시대 건축사 – 헤이조 궁(平城宮) 편

    나라 시대 건축사 시리즈, 오늘은 천황께서 거처하시던 궁궐, 헤이조 궁(平城宮)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현재 나라현에 있는 헤이조 궁터 역사공원에서는 스자쿠몬(朱雀門)과 제1차 대극전(第一次大極殿)이 복원되어 있어 누구나 그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게다가 이 복원 사업을 맡은 곳은 다케나카 한베이(竹中半兵衛)와 인연이 있다는 소문이 있는 초대형 종합건설사, 다케나카 공무점(竹中工務店)입니다. 역사와 현대 기술이 만난 색다른 조합이라 할 만합니다.헤이조 궁의 구조헤이조쿄(平城京)의 정문인 라슈몬(羅城門)에서 남북으로 뻗

  • 간무 천황은 왜 군단을 폐지했는가?

    ```html 간무 천황의 정치 개혁 가운데 군단과 병사(兵士) 제도의 폐지에 대해 앞서 간략히 소개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그 폐지의 이유를 좀 더 깊이 조사하여 정리해 보았다. 간무 천황, 군단을 폐지하다 간무 천황에 의한 군단 폐지는 792년(엔랴쿠 11년)에 단행되었다. 다만 도호쿠(東北) 지방과 규슈(九州)에서는 군단이 폐지되지 않았는데, 도호쿠에서는 774년부터 반란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삼십팔년 전쟁으로 불리는 이 분쟁은 오래 지속되었고, 결국 도호쿠가 완전히 진정된 것은 811년의 일이었다. 애초에 70

  • 일본 견당사 파견 현황 – 당나라와 주변국 정세의 변화

    이전 글에서 견당사에 대해 잠깐 소개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추가로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헤이안 시대는 894년 견당사 폐지를 앞둔 시기이므로, 그 이전까지의 견당사 이야기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견당사 파견 시기의 주변국 정세■ 당(唐) ····· 618년 수(隋)에서 개창 ⇒ 아시아 여러 나라에 큰 영향【전기 당(前期唐, 618~712)】당은 고조(高祖)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수 말기에 할거했던 군웅들이 잔존하고 있었지만 모두 통제 아래 두어졌고, 2대 황제 대에는 몽골 고원까지 세력권에 편입시켰습니다. 3대

  • 고대 일본 율령 국가의 교통 시스템: 역마와 역로 제도의 모든 것

    율령 국가와 도로 정비 오늘의 주제는 율령 국가와 도로 정비입니다. 아스카 시대 후반,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의 모습이 갖춰지면서 관리들의 서열 차이도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한편, 우리가 지금 법률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것이 탄생했습니다. 바로 701년의 대보율령(大寶律令)입니다. 율(律)은 오늘날의 형법에 해당하고, 령(令)은 행정법·민법에 해당합니다. 또한 령에는 행정 조직의 직무 규정과 운영 방침뿐 아니라 백성에게 부과되는 조세까지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법령 정비의 흐름 속에서 비상 연

  • 팔색의 성(八色の姓)이란? 일본 아스카 시대의 새로운 가바네 제도

    팔색의 성(八色の姓)은 684년(덴무 천황 13년)에 새롭게 정해진 여덟 개의 성씨, 즉 가바네(カバネ) 제도입니다.이 제도는 황실의 지위를 확보하고 황족의 서열을 명확히 매기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성씨 제도 자체의 기원과 배경이 궁금하다면, 이전 글인 고훈 시대의 성씨 제도에 관한 글을 함께 참고하시면 좋습니다.팔색의 성의 구성팔색의 성은 크게 실제로 수여된 성씨와 제정만 되고 수여되지 않은 성씨로 나눌 수 있습니다.실제로 수여된 성씨마히토(真人): 최고위의 성씨로, 게이타이 천황(재위 507~531년)의 근친 및 그 이후 역대

  • 후지와라쿄에서 헤이조쿄로 천도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라 시대(奈良時代)라고 하면 710년(와도 3년), 평성경(헤이조쿄)이라는 구절이 떠오르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헤이조쿄로의 천도는 아스카 시대와 나라 시대를 나누는 경계선이기도 합니다.이번 글에서는 헤이조쿄로 천도하게 된 이유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후지와라쿄에서의 천도 이유약 1300년 전, 헤이조쿄로 천도하기 전 수도였던 곳은 후지와라쿄(藤原京)였습니다.『일본서기』에 따르면 덴무 천황 시대인 676년에 후지와라쿄 축조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덴무 천황의 붕어로 한때 중단되었지만, 지토 천황이 계획을 이어받아 690

  • 헤이조쿄 출토 유물로 엿보는 당시 사람들의 삶

    헤이조쿄(平城京)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삶을 보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땅속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마음을 생생하게 전해 줍니다.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천 년 전 수도의 풍경을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헤이조쿄에서 출토된 주요 유물헤이조쿄는 나라의 정치 중심지였던 만큼, 관리들이 실무에 사용하던 도구들이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목간(木簡)을 작성할 때 쓰던 벼루·먹·붓 같은 필기구입니다. 이러한 유물들은 수도가 행정의 중심으로서 활발하게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농촌까지 퍼진 문자 문화, 먹

  •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 문제와 전후 처리 — 독일과 일본의 길이 갈린 이유

    시사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역사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내용은 일본 경제지 『프레지던트(PRESIDENT)』에 실린 역사는 먹히는가라는 기사입니다. 현대사와 직결된 주제라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종전 기념일을 맞아 이번에는 전쟁을 주제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세계사, 특히 중국사도 함께 다룹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종전 담화를 발표했는데, 왜 그렇게 큰 논란이 일었을까요? 이해하기 쉽도록 배경을 정리하며 살펴보겠습니다.근세 시기 일본과 중국의 역사적 배경오늘날 한중 관계를 이해하려면 근세, 특히 그

  • 나라 시대에 승려가 늘어난 이유와 간진 화상이 일본에 온 이유

    지난 글에서 다룬 승려가 일본에 온 이유에 이어, 이번에는 특히 간진(鑑眞) 화상에게 초점을 맞춰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주제인 승려의 수가 늘어난 이유에는 간진이 일본에 온 이유에 대한 단서가 숨겨져 있을 듯하여, 두 가지를 함께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승려 수가 늘어난 일본의 상황710년 수도가 헤이조쿄(平城京)로 천도되었지만, 이 무렵 천황의 거처인 궁성은 어느 정도 완비된 상태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헤이조쿄를 조성하는 과정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인력과 물자가 끊임없이 운송되어야 했습니다.헤이조쿄 부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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