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아시아의 역사

  • 전성기 이마가와 가문을 떠받친 승려, 오하라 세사이의 생애

    오헤하자마 전투 직전의 세력 판도를 보면,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스루가·토토미·미카와를 지배하고, 간토의 호조 씨, 가이의 다케다 씨, 미노·오와리의 오다 씨 등 강대한 세력에 둘러싸인 가운데서도 이들을 견제하며 도카이도의 요충지를 장악한 다이묘였습니다.호조 씨·다케다 씨와의 삼각 동맹(불가침 조약) 역시 이마가와 요시모토에 의해 실현된 것입니다.당시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천하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영내에서는 검지(檢地)를 실시하고, 아버지 우지치카가 제정한 법령을 증보하는 등 커다란 업적을 남겼습니

  •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진 실력자들, 전국 유명 다이묘의 아들들은 사실 꽤 유능했습니다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초유명 전국 다이묘들의 아들들은, 너무나 위대한 아버지 덕분에 오히려 과소평가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상당히 유능한 무장이었던 경우가 많습니다.이번 글에서는 아버지의 강렬한 존재감 속에 묻혀 제 실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전국 다이묘들의 아들들을 조명해 보겠습니다.아버지 시겐 이상으로 강력했던 아들, 다케다 가쓰요리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 1546~1582)다케다 가쓰요리는 다케다 시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원래 시겐의 적장자였던 요시노부가 폐적되면서, 가쓰요리가 명문 다케다

  • 오늘날에도 통할 일본 역사 속 매력적인 미남 인물들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훈훈한 남자들...긴 일본의 역사 속에도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인기 에피소드를 지닌 인물들이 많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역사 속 미남 인물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사카모토 료마(1836~1867)역사 교과서에서 익숙한 사카모토 료마. 하지만 앞으로의 역사 교과서에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막말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의 유명한 사진을 보면 마른 체형에 선 자세가 단정해 인상이 좋습니다.당시 그는 남녀 모두에게 사랑받는 성격이었고, 약혼 이야기가 나올 정도의 연인도 있었으며 일본 각지의 여성들과 폭넓

  • 메이지 천황의 생애와 업적 – 막말의 격동기를 이끌고 근대 일본의 길을 연 천황

    2018년은 메이지(明治) 연호가 시작된 지 15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일본 역사에서 메이지 시대는 큰 전환점에 선 매우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메이지 천황이 있었는데요. 오늘은 메이지 천황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메이지 천황의 즉위메이지 천황은 에도 시대 말기인 1866년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孝明天皇)이 붕어하자, 이듬해인 1867년 14세의 나이로 즉위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정도의 소년이 에도 막부 말기라는 격동의 시기에 새 정부의 중심에 서야 했으니, 상상하기만 해도 엄청난 부담이었을 것입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장 두려워한 명장 가모 우지사토, 상인 육성의 달인이 되다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는 전국시대의 무장이자 희세의 영웅으로 꼽힙니다. 놀랍게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를 도쿠가와 이에야스보다 더 두려워했다고 전해집니다.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가 백만 석을 거느린다면 누가 가장 강한 무장일까? 가신들에게 물었을 때 많은 이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도시이에를 꼽았지만, 히데요시 본인은 가모 우지사토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가모 우지사토는 인생 한복판인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은 우지사토의 생애와 그가 펼친 경제 정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인질에서 시작된

  • 막부의 감시를 뚫고 가가 백만 석을 지켜낸 제2대 번주 마에다 도시쓰네

    에도 막부 시대, 가가 번(加賀藩)은 외양 대명(外様大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삼경(御三家)에 필적하는 후대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막부가 일국 일성령(一国一城令)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한 국가에 두 개의 성을 인정받는 특례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후대는 막부 창설 초기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초기에는 막부의 예리한 감시망이 가가 번에 쏠려 있었는데, 이 위기를 넘긴 장본인이 바로 제2대 번주 마에다 도시쓰네(前田利常)였습니다. 마에다 도시쓰네, 양자로 들어간 가문 계승 도시쓰네는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 뜻밖에도 많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역사 속 여성 무장들

    2017년 NHK 대하드라마 『여성 성주 나오토라(おんな城主 直虎)』는 이이 나오토라를 주인공으로 다룬 작품입니다. 방송 시작 직전에는 “나오토라는 사실 남자였다는 설”이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드라마는 여성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어 시청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성주로서 당당히 지휘봉을 휘두른 인물이 여성이라니, 조금 의외라고 느껴지시지 않나요? 하지만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이 나오토라 외에도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유명 여성 무장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런 여성 무장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를 섬긴 여

  • 응인의 난부터 전국시대까지, 하극상(게코쿠조)의 시대는 어떻게 열렸나

    전국시대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무로마치 막부 성립부터 응인의 난(應仁の亂)까지의 흐름을 간단히 짚어보겠습니다.겐무 신정의 붕괴와 무로마치 막부의 성립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 뒤,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은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을 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권은 공가(公家, 귀족) 중심의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무사(武士) 계급의 불만이 커져 갔습니다.이에 반발한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고다이고 천황에게 반기를 들면서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겐무 신정은 결국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다카우지는 다른 천황을 옹

  • 일본 성과 세계 성의 차이점, 왜 일본에는 석조 대건축물이 없을까?

    일본의 성은 천수각(天守閣)을 비롯해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사실 일본에는 고대부터 인덕천황릉(대산고분), 도다이지(東大寺), 히메지성처럼 세계적인 수준의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일본의 성은 유럽이나 중국의 성곽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세계의 성과 일본 성의 구조적 차이일본과 세계의 근대 이전 건축물 및 초대형 구조물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매우 큽니다.그리스 신전이나 피라미드 같은 세계의 거대 건축물이 거의 일정한 치수로 가공된 석재를 쌓아 만든 것과 달리,

  •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천수각, 왜 지었을까? 일본 성곽의 숨은 이야기

    일본의 성(城)이라고 하면 우리는 곧 눈에 띄는 천수각(天守閣)을 떠올립니다.실제로 한자어 사전에서 성을 찾아보면 성이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높은 건축물이라고 되어 있어, 결국 성 = 천수각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그러나 일본의 대표적 국어사전인 광사전(広辞苑)에는 적을 막기 위해 만든 군사적 구조물이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즉 천수각뿐만 아니라 해자·석벽·울타리 등의 구조물로 둘러싸인 군사적 목적의 공간 전체를 성으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따라서 오늘날 히메지성처럼 웅장한 천수각이 남아 있어도 더 이상

  • 지형에 따른 일본 성곽의 형태 차이 — 산성·평산성·평성

    (본문 이미지는 우라베 연구소에서 인용했습니다.) 일본 성곽은 축조된 지형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본격적인 내용에 앞서 이 분류를 먼저 기억해 두면 이해가 훨씬 쉽습니다. 산에 축조된 성 ⇒ 야마시로(山城, 산성) 구릉지를 활용한 성 ⇒ 히라야마성(平山城, 평산성) 평지에 축조된 성 ⇒ 히라조(平城, 평성) 산성에서 평성·평산성으로의 변천 무사 계급이 탄생한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아직 성이라 부르기 어려운 평지 저택이 주류였습니다. 그러다 가마쿠라 시대부터 산을 이용한 야마시로(산성)가 본격적으로 축조되기 시작합니다.

  • 일본 성에는 석벽은 있었는데 왜 돌로 지은 건물은 없었을까?

    세계 고대 문명에서 대형 건축물의 주류는 돌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동사원(東大寺)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조차 목조 건축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일본의 성에도 돌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건물 자체는 나무나 흙으로 짓고 기단 부분에만 돌을 쌓은 석벽(이시가키)을 두르는 방식이었습니다.그 이유는 일본에는 가공하기 쉬운 양질의 돌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일본 성과 외국 성의 차이외국에서는 성벽이 성과 성시(城下町) 전체를 둘러싸는 형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해자를 파고 흙을 다져 쌓아 올린 토루(土塁)를 성벽 삼았습니다

  • 일본 '명성(名城)'의 조건 – 어떤 성이 유명한 성으로 불릴까?

    오늘날 많은 근세 성곽은 명성(名城), 즉 유명한 성으로 불립니다.물론 유명한 성이 되기 위한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성은 본래 군사 시설이기 때문에 군사적 교묘함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일반인 입장에서는 그런 관점에서 평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그런데 근세 성곽은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 역시 중요한 평가 요소이며, 이러한 점 덕분에 각 지역의 성들은 지역 주민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유명한 성의 조건에 대해

  •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가신이자 첩, 여무장 바고젠의 생애와 무용담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에 관한 글에서 바고젠(巴御前)에 대해 잠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바고젠은 요시나카의 가신이자 첩으로, 그가 전장에 나서면 기소 요시나카 군의 장수로서 활약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헤이케 이야기』와 『겐페이 성쇠기』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도 존재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고젠은 겐페이 전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녀의 인기와 인지도는 기소 요시나카 본인보다 더 높다고 평가될 정도입니다.이번 글에서는 바고젠의 생애와 무용담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기소 요시나카와 함께 다이

  • 무로마치 막부 후계자를 둘러싼 권력 다툼, 응인의 난으로 가는 길

    무로마치 시대 중기, 제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는 1449년부터 1473년까지 재직했습니다.쇼군에 취임한 그는 할아버지 요시미츠와 아버지의 정책을 되살리려 하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정실 히노 도미코(日野富子)를 비롯해 호소카와 카츠모토(細川勝元)·야마나 소젠(山名宗全) 등 유력 슈고 다이묘들이 정치에 깊이 개입하면서, 요시마사 주도의 정무 운영은 점차 어려워졌습니다.기타야마 문화와 히가시야마 문화요시마사 정치 초반에는 쇼군청(막부)의 재정이 요시미츠 시대만큼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실권을 빼앗긴

  • 하극상의 선구자, 아사쿠라 다카카게와 오닌의 난

    아사쿠라 씨(朝倉氏)라고 하면 오다 노부나가와 싸운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가 가장 먼저 떠오르곤 합니다.아네가와 전투에서는 아자이 나가마사와 함께 싸워 노부나가를 후퇴시키기도 했지만, 이후 일조다니 전투에서 노부나가에게 멸망당했기 때문에 패배한 무장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11대 당주 요시카게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오닌의 난 당시, 7대 당주 다카카게는 서군을 대표하는 주력 무장으로서 크게 활약했으며, 그 위풍으로 서국 제일의 용장이라 불렸습니다.오닌의 난과 아사쿠라 씨아사쿠라 씨

  • 무로마치·전국시대에 빈번히 일어난 민중의 반란, 토치잇키와 국일기

    전국시대의 역사에서 다이묘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토치잇키(土一揆)가 일어났고, 야마시로에서는 국인(國人)들에 의한 국일기(国一揆)도 발생했다고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이번 글에서는 무로마치 시대와 전국시대에 일어난 반란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마자쿠(馬借)가 주도한 반란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고 하극상(下剋上)의 움직임이 나타난 무사 사회와 마찬가지로, 농민과 상인을 중심으로 한 국인 계층의 자주성이 강화되면서 영주 계급에 대항하는 운동도 거세어졌습니다.운송업에 종사하던 마자쿠(馬借) 집단은 오미(近江)의 사카모토(坂本)나 구사쓰(

  •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쿠데타, 무로마치 막부의 운명을 바꾼 '명응의 정변'

    오닌의 난(1467~1477) 이후 혼란이 이어지던 무로마치 막부. 오미를 다스리던 롯카쿠 가문이 각지의 영지를 강점하며 세력을 키워나가자, 제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는 직접 토벌에 나섰지만 원정 도중 병사하고 말았습니다.그러자 막부에는 다시 후계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요시마사의 조카이자 양자였던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밀었지만, 히노 도미코는 자신의 아들이자 요시미의 아들인 요시타네를 추천했습니다. 제8대 쇼군이었던 요시마사 역시 요시타네를 지지했기 때문에, 결국 요시타네가 제10대 쇼군으로 즉위하게 됩니다.이

  • 섭관정치와 후지와라씨의 영광

    ```html 간무 천황과 사가 천황 시대에는 천황이 귀족들에 대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며 국정을 직접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의 차남 계통인 후지와라 북가(北家)는 천황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강화하면서 세력을 넓혀 갔다. 후지와라 북가의 대두 당시 후지와라 북가는 후지와라노 후윳츠구(藤原冬嗣)가 사가 천황의 깊은 신임을 얻어 내장두(内蔵頭)에 임명되고, 황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기반을 다졌다. 후윳츠구의 아들 요시후사(良房)는 842년 조와의 변(承和の変)을 계기로 오토모씨와 다치바나씨의 세력을 배

  • 세키가하라 전투란? 천하를 가른 결전의 배경과 흐름 총정리

    오다 노부나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주군이었던 노부나가의 가신들마저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여 화려하게 천하 통일을 이루어냈습니다.천하를 안정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히데요시는 정권 내에 가로(家老)와 봉행(奉行)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그중 중신들의 수장격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주로 군사 업무를 담당했고, 봉행을 총괄하는 입장에 있던 이시다 미쓰나리는 행정 실무를 맡아 역할을 분담했습니다.원래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있던 인물입니다. 한때 노부나가의 가신에 불과했던 히데요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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