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유럽의 역사

  • 1978년 7월, 첼러 로흐 사건: 국가가 연출한 '가짜 테러'가 니더작센을 뒤흔든 전말

    작성자: Michael Lange1978년 7월 25일 새벽 2시 54분, 독일 니더작센주 첼레(Celle) 교도소에서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밤하늘을 밝혔습니다. 망루의 경비요원들이 비상경보를 울리고 탐조등으로 비춘 높이 6미터의 외벽에는 지름 약 40센티미터의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언론과 경찰은 좌익 테러조직의 감옥 습격을 의심했지만, 훗날 드러난 진실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구멍은 헌법수호처(국내정보기관)가 직접 낸 것이었고, 당시 CDU 주정부는 이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첼러 로흐(Celler Loch, 첼레의

  • 1977년 '그론데 전투': 2만 명 반핵 시위의 현장 기록, 그리고 44년 만에 닫힌 원전

    1977년 3월 19일, 약 1만 2천 명의 시위대가 4,800명이 넘는 경찰과 연방 국경수비대와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반핵 시위대는 그론데(Grohnde) 원자력발전소 건설 부지를 둘러싼 이중 철조망 울타리 중 15미터 구간을 무너뜨렸습니다.그날 베저고원(Weser Uplands)에는 이른 봄 기운이 감도는 화창한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날의 목적은 봄나들이가 아니었습니다. 하노버에서 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작은 마을 그론데로 2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어 베저 강변 원자력발전소(NPP) 건설에 반대

  • 개통 33일 만에 무너진 엘베 측면운하… 1976년 댐 붕괴 참사의 전말

    1976년 6월 15일, 뤼네부르크 하이스(Lüneburg Heath)를 가로질러 115km를 달리며 엘베 강과 미텔란트 운하(Mittellandkanal)를 잇는 엘베 측면운하(Elbe-Seitenkanal)가 화려한 개통식을 맞았습니다. 당시 이 수로는 세기의 건설로 기념되었습니다. 그러나 축제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개통 단 33일 만인 같은 해 7월 18일 일요일, 운하 제방이 붕괴하면서 수백만 입방미터의 물이 주변 지역으로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이후 인간과 물의 사투가 시작되었습니다.첫 경고는 지

  • 1976년 함부르크항 폭발 사고: 27명의 생명을 앗아간 '앤더스 머스크'호 보일러 참사의 전말

    원문: Irene Altenmüller, NDR.de1976년 1월 9일 저녁, 함부르크 항구의 조선소 블롬+포스(Blohm + Voss)에서는 2교대 근무자들이 다가오는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길이 209미터에 달하는 컨테이너선 앤더스 머스크(Anders Maersk)호의 신조 공사 한복판이었습니다. 이 배는 9척으로 구성된 자매선 시리즈 중 하나로, 그중 6척이 블롬+포스에서 건조되고 있었습니다.시험 운항은 불과 8일 뒤로 예정되어 있었고, 엔진실에 설치된 높이 6미터의 강재 탱크는 마지막 압력 시험을 앞두고

  • 1976년 1월 허리케인 '카펠라' — 함부르크에 사상 최고 폭풍 해일을 남긴 밤

    1976년 1월 3일, 북해에서 같은 이름의 허리케인이 맹위를 떨치던 그날 밤, 동독 화물선 카펠라(Capella)의 승무원 11명 전원이 목숨을 잃습니다. 동시에 해일은 엘베 하류(Lower Elbe) 지역을 범람시켰고, 함부르크의 수위는 관측 사상 최고치를 기록합니다.글: 이레네 알텐뮐러(Irene Altenmüller)1976년 1월 첫 번째 토요일 이른 아침, 독일 만(German Bight)에 극심한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허리케인 카펠라는 시속 150km의 바람으로 북해의 물을 해안으로 밀어 올렸고, 만조와 겹치면서 독일

  • 45년 전 함부르크 중앙역 폭탄 테러, 좌파 극단주의자의 소행일까?

    1975년 9월 13일 함부르크 중앙역에서 발생한 폭탄 폭발로 11명이 다쳤습니다.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범인은 잡히지 않은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1975년 9월 13일, 토요일 오후 4시 29분토요일 오후 4시 29분, 거대한 폭발음이 함부르크 중앙역을 뒤흔들었고 금속 파편이 공중으로 흩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청했고, 혼잡한 역 안을 패닉 상태로 내달렸습니다. 빵집 바로 옆 물품 보관함에서 폭탄이 터진 것이었고, 이 사건으로 11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폭발 장치가 터지기 약 2분 전, 함부르크 소방당

  • 발트해 한복판의 결전: 범선을 타고 동독을 탈출한 게트 가족의 극적 탈출기

    위르겐 코프(Jürgen Kopp), 카스텐 빅(Carsten Wick) 공동 집필독일 분단 역사상 가장 극적인 탈출 사건 중 하나로 꼽힙니다. 1975년 7월 15일, 게트(Gaeth) 가족은 로스토크 바르네뮌데(Rostock-Warnemünde)에서 범선을 타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노이슈타트(Neustadt)로 도피했습니다. 발트해 한가운데에서는 동독과 서독 국경수비대가 중무장한 군함으로 마주 대치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한 가족의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 범선 위에서 벌어진 사실상의 군사적 대결로 번진 순간이었습니다

  • 시위로 탄생한 대학, 올덴부르크 대학교가 걸어온 40년의 기록

    올덴부르크 대학교(University of Oldenburg)는 수많은 시위와 항의 끝에 비로소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특별한 이력을 지닌 대학입니다. 이번 기념일은 1년간 이어지는 축제로 진행되며, 그 좌우명은 바로 새로운 길을 향한 40년입니다. 1960년대 초 니더작센주 북서부, 특히 올덴부르크와 오스나브뤼크 지역에서는 대학 설립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1971년 3월 1일, 주정부 법령에 따라 올덴부르크 대학교 설립을 위한 창립위원회가 공식 임명되었습니다. 주로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진 창립

  • Damp 2000, 초원에서 휴양지로: 발트해를 바꾼 거대 리조트 50년의 그때와 지금

    같은 장소에서 찍은 과거 사진과 현재 사진을 나란히 비교하는 것 — 이것이 시리즈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그때와 지금의 핵심입니다. 독일 최북단 연방주의 도시들이 겪어온 변화를 기록하는 이 프로젝트는 인터랙티브 사진 비교를 통해 한층 생생하게 전달됩니다.세바스찬 파자니(Sebastian Fazzani) 집필예전에는 이곳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저 드넓은 초원과 해변뿐이었죠. 십 대 시절 우리는 여기서 수영을 했고, 해변 전체를 우리만의 것처럼 누렸습니다. Damp의 오래된 주민 두 사람은 웃으며 회상합니다. 눈앞에는 밝은 모래사장과

  • 1972년 뮌헨 올림픽, 항해 경기의 무대가 된 킬: 발트해 항구 도시의 대변신

    1972년 8월 28일, 제20회 하계 올림픽이 정식으로 개막했습니다. 대회의 대부분 경기는 뮌헨과 바이에른 지역의 여러 도시에서 진행되었지만, 요트·항해 경기만은 예외적으로 북독일의 항구 도시 킬(Kiel)에서 열렸습니다.1936년 베를린 대회 이후 독일이 두 번째로 올림픽을 개최한 해였고, 킬에게도 36년 대회에 이어 두 번째 올림픽 항해 무대였습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도(州都) 킬은 인근 트라베뮌데(Travemünde)와의 유치 경쟁 끝에 항해 경기 개최지로 선정되었으며, 대회 기간 동안 약 50개국 선수단이 킬에 집결해

  • RAF 테러리스트 울리케 마인호프(Ulrike Meinhof)는 어떻게 체포되었나 — 하노버의 한 통의 제보가 바꾼 1972년 여름

    1972년 초여름, 서독 사회를 뒤흔든 적군파(RAF, Rote Armee Fraktion) 1세대 간부들이 잇달아 검거되었습니다. 6월 15일에는 조직의 상징적 인물 울리케 마인호프(Ulrike Meinhof)마저 하노버 근교에서 체포되었는데, 결정타는 지역 주민의 단 한 통의 제보였습니다.글: 악셀 프란츠1970년대 초, 안드레아스 바더(Andreas Baader)와 울리케 마인호프가 이끄는 적군파(RAF)는 스스로를 혁명가라 칭하며 서독(독일연방공화국)의 정치 체제에 무력으로 맞섰습니다. 이들의 무장투쟁은 1960년대 서독 학

  • 함부르크 경찰, 1971년 적군파(RAF) 첫 살인 희생자 되다

    노르베르트 슈미트(Norbert Schmid)는 적군파(Rote Armee Fraktion, RAF)의 첫 살인 희생자다. 1971년 10월 22일 함부르크에서 근무 중이던 이 공무원은 총에 맞아 숨졌으나, 용의자로 지목된 범인은 끝내 유죄 판결을 받지 못했다. 국가가 내 남편을 배신했다고 훗날 슈미트의 아내는 말했다. 작성: 요헨 람베른트(Jochen Lambernd) 노르베르트 슈미트, 수 발의 총탄에 맞다 1971년 10월 22일 밤, 경찰관 노르베르트 슈미트와 하인츠 렘케(Heinz Lemke)는 함부르크-포펜뷔텔 S반

  • 1971년 A7 고속도로 추락 참사, 등유·증류수 혼동이 남긴 22명의 비극

    1971년 9월 6일 오후, 함부르크 푸hl스뷔텔 공항에는 스페인 남부로 향하는 휴가 여행객 수십 명이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15명의 승객 대부분은 편안한 휴가를 그리며 마음껏 설레고 있었지만, 이들 중 22명에게 이 비행은 끝내 말라가에 닿지 못하는 죽음의 여정이 되고 말았습니다.판인터내셔널 112편: 이륙 직후 두 엔진 동시 폭발오후 6시 19분, 뮌헨 소재 항공사 판인터내셔널(Paninternational)이 운항하는 영국항공우주(BAC) 1-11 전세기가 이륙했습니다. 그러나 막 하늘에 오른 직후 좌석벨트 경고음마저

  • 모두를 위한 문화, 함부르크 파브리크(Fabrik) — 독일 최초 문화·커뮤니케이션 센터의 이야기

    카바레 예술가 한스 샤이브너(Hans Scheibner)는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알토나에 공장이 하나 있었지. 많은 사람이 속물로 들어갔다가 인간이 되어 돌아왔네. 그가 말한 공장은 바로 함부르크 알토나(Altona) 지역의 파브리크(Fabrik)입니다. 1971년 6월, 기계·군수공장으로 쓰이던 건물에 문을 연 이곳은 독일 최초의 문화·커뮤니케이션 센터입니다. 모두를 위한 문화라는 모토 아래 창의성, 소통, 주도성, 자신감을 키우는 것이 설립 목표였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은 물론 독서, 연극, 토론, 라이브 음악까

  • 폭탄과 죽음의 30년: 독일 적군파(RAF) 테러 조직의 흥망성쇠

    폭탄과 죽음의 30년: 독일 적군파(RAF) 테러 조직의 흥망성쇠 적군파(Rote Armee Fraktion, RAF)는 1960년대 후반 서독 학생운동의 여파 속에서 태어나 연방공화국 역사상 가장 잔혹한 좌익 테러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약 30년간 이어진 폭력의 종막은 1998년 해체 선언이었지만, 지금도 수많은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적군파(RAF)는 1970년 봄 안드레아스 바더(Andreas Baader), 울리케 마인호프(Ulrike Meinhof), 구드룬 엔슬린(Gudrun Ensslin)을 중심으로

  • 1989년 Kavelstorf 비밀 무기고 발굴 — '평화국가' 동독의 무기 거래가 드러난 결정적 순간

    돌격소총, 칼라시니코프, 권총, 그리고 탄약이 가득 담긴 팔레트. 1989년 12월 2일, Kavelstorf(카벨스토르프) 주민들은 비밀 무기고를 발견했고, 이를 계기로 평화국가를 표방하던 동독의 무기 거래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글·취재: 안드레아 하세(Andrea Hase)로스토크 인근의 조용한 마을 Kavelstorf. 주민들은 오랫동안 저곳에서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진다고 의심해 왔습니다. 창고는 철저히 경비된 건물 안에 있었고, 젊은 경비 인력이 24시간 근무를 서며 Deutrans 트럭이 정기적으로 드나들었습니다

  • '트라비 침공' 그날 밤, 슐루투프 국경에서 목격한 베를린 장벽 붕괴의 생생한 기록

    Thorsten Philipps 작성 | 1989년 11월 10일 NDR 1 Welle Nord — 슐루투프(Schlutup) 국경 교차점에서의 동서독 인사이상한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눈부신 헤드라이트 사이로 첫 번째 트라반트(Trabi)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슐루투프의 호르스트 슈반케(Horst Schwanke)는 1989년 11월 9일 저녁, 뤼베크-슐루투프 국경에서 동독 시민들을 맞이한 최초의 서독인이었다고 회상합니다. 당시 48세의 은행 직원이었던 그는 트라반트를 몬 남자가 필스 맥주 한 병을 들고 나에게

  • 샤보스키의 메모: '즉시, 지체 없이' 한 문장이 무너뜨린 베를린 장벽 (1989.11.9)

    1989년 11월 9일 저녁, 동베를린의 한 기자회견장에서 흘러나온 한 문장이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습니다. SED 정치국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Günter Schabowski)가 텔레비전 생방송에서 새로운 여행 규정이 즉시, 지체 없이 발효된다고 발표한 순간, 베를린 장벽은 사실상 그 힘을 잃었습니다. 이 역사적 전환점의 중심에는 지금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작은 손글씨 쪽지, 이른바 샤보스키의 메모가 있습니다.여행 규정 초안, 단 하루 만에 통과되다1989년 11월 9일 아침, 인민경찰 대령 게르하르트 라우터(Gerhard L

  • 1989년 평화혁명, 그 첫 불씨는 조용한 도시 워렌에서 피어올랐다

    1989년 가을,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의 거리는 이미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메클렌부르크의 작은 도시 워렌(Waren)은 아직 고요했다. 그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10월, SED 정권에 맞선 첫 번째 시위가 뮤리츠(Müritz) 일대에서 일어난 것이다.동독 40주년 축제와 무심했던 호수 도시1989년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이 되는 날에도 워렌(메클렌부르크 호수고원(Mecklenburgische Seenplatte) 지역)은 여전히 조용했다. 반면 수도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에서는 동독 정부에 반대하는

  • 1989년 9월, 독일 해군 훈련선 ‘고르히 포크’호에 처음 승선한 여성들 – 연방군 여성 복무의 역사

    독일 해군의 범훈련선 ‘고르히 포크(Gorch Fock)’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성평등의 흐름을 몸소 겪었습니다. 1989년 9월 14일, 여성 장교 후보생들이 처음으로 훈련 항해에 나섰습니다.글쓴이: Susanne Abolins-Aufderheide약 30년 동안 선원 전원이 남성으로만 구성되어 왔던 이 전통 있는 범선에서도 사회·정치적 변화의 물결이 밀려온 것입니다. 비무장 의무복무를 수행하는 젊은 여성 장교 후보생 5명이 ‘고르히 포크’호에 처음 올라, 모항 킬(Kiel)을 떠나 지중해 방향으로 훈련 항해에 나섰습니다.특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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