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유럽의 역사

  • 313년 밀라노 칙령이란? 기독교 공인과 종교의 자유 보장의 모든 것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비롯한 각종 시험에서 기독교는 밀라노 칙령에 의해 국교화되었다는 OX형 문제가 자주 출제됩니다.정답은 X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밀라노 칙령이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국교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애초에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공인한 것이며, 로마 제국 내에서의 종교의 자유를 확인한 것이 정확한 이해입니다.또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반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회담을 가졌을 때 발표한 공동 선언입니다.

  • 로마 제국 사분할 통치(테트라르키아)의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 해설!

    군인황제 시대의 종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장3세기의 위기라고 불리는 로마 제국의 혼란기에는 약 50년 동안 무려 25명의 황제가 요절하거나 살해되는 등, 군인황제의 시대가 계속되었습니다.이 혼란을 종식시킨 마지막 군인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광대한 로마 제국을 한 명의 황제의 힘으로 통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두 명의 정통 황제를 세우는 이두 통치 체제(디아르키아)를 구성해 제국을 분할 통치했지만, 그마저도 역부족이었습니다.그래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정통 황제(아우구스투스) 아래에 부황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후계자들 – 다시 시작된 피의 권력 다툼

    세계사적 카리스마라고 불릴 만한 인물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자, 로마 제국은 다시 한번 내전의 시대로 되돌아갔다. 생전에도 피로 물든 삶이었던 콘스탄티누스였지만, 그가 죽은 뒤의 상황은 그보다 더 참혹했다. 피의 씨족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 후보들 먼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후계 자격이 있던 인물들을 짚어보자. 크리스푸스(장남) : 첫 번째 아내 미네르비나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차남) : 황후 파우스타의 아들 콘스탄티우스(삼남) : 황후 파우스타의 아들 콘스탄스(사남) : 황후 파우스타의 아들

  • 발렌티니아누스 1세·발렌스·그라티아누스·발렌티니아누스 2세, 로마 제국 말기의 황제들 이야기

    율리아누스 황제가 죽자 요비아누스가 잠시 제위에 올랐고, 그 뒤를 이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인물이 바로 발렌티니아누스 1세입니다.로마 제국 최초의 게르만계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로마인의 강점은 적이라 여겼던 자들마저 동화시켜 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왕정 시대부터 에트루리아인들이 로마를 이끌어 왔다면, 로마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게르만족이 드디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발렌티니아누스는 오늘날 헝가리 일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부근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대부터 로마군 지휘관으로 활약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

  • 로마 제6대 황제 갈바, 기록에 남을 만큼 짧았던 통치기

    황제 네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 불리던 로마 최초의 황제 가문이 막을 내렸습니다.네로 생전의 정치적 소요도 상당했지만, 그가 죽은 뒤 로마를 덮친 혼란은 그보다 훨씬 컸습니다.단 한 해 동안 세 명의 황제가 교체되며 로마는 전례 없는 위기에 빠졌고, 다시 한번 내전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사황제의 해(서기 68~69년)라 부릅니다.완벽하던 귀족 엘리트의 인생 코스로마에는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 즉 명예로운 경력의 사다리라 불리는 관료 진로가 있었습니다.젊은

  • 재위 단 3개월! 로마 제국 7대 황제 오토의 흥망사

    로마 제국 7대 황제 오토는 네로 황제 사후 한 해 동안 세 명의 황제가 차례로 교체되던 격동기에 잠시 왕좌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오랫동안 네로와 가까운 사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틀어지게 됩니다. 그 결정적 계기는 다름 아닌 오토의 아내였습니다. 아내를 빼앗긴 오토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사랑에 빠진 여인 리비아를 얻기 위해 그녀의 남편에게 이혼을 요청했고,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던 그 남편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너무나 닮은 일이 네로에게도 벌어집니다. 미녀 포파이아와 결혼하고 싶었던 네로는 오토에게 아우

  • 먹는 것을 좋아했던 로마 제8대 황제 비테리우스

    라틴어 표기로는 비텔리우스(Vitellius)가 정확하지만, 이 블로그에서는 미네르바나 네르바처럼 최대한 부드럽게 읽히는 표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비테리우스로 표기했습니다.황제 네로가 죽은 뒤, 1년 동안 세 명의 황제가 차례로 몰락하는 이른바 3황제 시대가 찾아옵니다. 비테리우스는 바로 그 세 명 중 마지막 황제입니다.로마 최강의 게르마니아 군단 사령관로마의 잠재적 적은 제국 초창기부터 멸망 때까지 늘 페르시아와 게르만이었습니다. 페르시아는 파르티아나 사산조 같은 문명 국가였기에 협상이 가능했지만, 게르만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 로마에 다시 빛을 불러온 9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세계사 교과서에는 네로나 테오도시우스의 이름이 빠지지 않지만, 정작 베스파시아누스라는 이름이 실린 세계사 교과서는 거의 없습니다.아마도 그의 통치 시기가 화려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이 곧 성과가 없었다는 뜻일까요?이번 글에서는 로마 제국 9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치기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네로의 공연에서 잠들어 버리다베스파시아누스의 관료 인생은 순탄한 궤도를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엘리트가 밟아야 하는 명예로운 경력 코스인 쿠르수스 호노룸을 따라 젊은 시절 재무관(쿠아에스토르)과

  • 로마 제국 제10대 황제 티투스, 단 2년의 재위에도 '선정(善政)'으로 기억된 이유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로 시작된 플라비우스 왕조의 두 번째 황제이자, 로마 제국의 제10대 황제입니다. 재위 기간은 불과 2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극적인 사건들과 훌륭한 통치로 후세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인물입니다. 황실에서 교육받은 소년기 티투스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는 명문 귀족이 아닌 기사(에퀴테스) 계급 출신이었습니다. 임대 주택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지만,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비서 나르키소스와의 인연 덕분에 티투스는 황태자 브리타니쿠스와 함께 교육을 받으며 궁정에서 자랐습니다. 키가 작고 체격이 미약했다고 전해

  • 로마 제11대 황제 도미티아누스, 정말 폭군이었을까?

    역사 기록들은 도미티아누스에 대해 극도로 혹독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그 근거는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 같은 로마 역사가들의 서술, 그리고 사망 후 원로원이 기록 말소형(damnatio memoriae)을 선고했다는 사실이다.원로원이 기록 말소형을 선고한 황제는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 단 세 명뿐이다. 칼리굴라와 네로에게는 일부 옹호론과 재평가 움직임이 있었던 반면, 도미티아누스에 대해서는 그런 시도조차 거의 없었다.그런 점에서 보면 그는 최악의 황제처럼 보이지만, 과연 실제로 그럴까?제11대 로마 황제도미티아누스는 제9대 황

  • 로마의 마지막 주인! 무직으로 사망한 스틸리코의 비극

    서기 395년,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서거하자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할되었습니다.동로마는 장남 아르카디우스가, 서로마는 차남 호노리우스가 통치하게 됩니다. 세계사 교과서에는 보통 여기까지만 적혀 있죠.하지만 실제로 아르카디우스는 18세, 호노리우스는 불과 10세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그리고 수험생들이 모르는 또 한 가지 이야기, 바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녀인 세레나와 결혼한 장군 스틸리코의 분투기입니다.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까지는 아직 80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로마의 마지막 주인이라 불린 스틸리코의

  • 로마 역사상 최고의 장군,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의 생애와 업적

    네로 황제는 폭군이라는 악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즉위 초기 5년간은 세네카 등 현명한 신하들의 보좌를 받아 훌륭한 정치를 펼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 시기 세네카와 함께 네로를 지원한 인물이 바로 이번 글의 주인공,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Gnaeus Domitius Corbulo)입니다. 네로는 기독교인 박해 등 여러 사건으로 폭군의 이미지가 굳어졌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을 성심껏 보좌했던 세네카와 코르불로마저 처형했습니다. 명장 코르불로의 등장 코르불로는 로마에서 특별히 명문 귀족 출신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연 오도아케르, '팍스 바르바리카'라는 평화를 세우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인물로 거의 빠짐없이 언급되는 오도아케르. 그러나 정작 그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흥미로운 점은, 로마의 문화와 관습이 사실상 소멸된 이 시기에는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전통 자체도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원전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의 기록이 오히려 더 상세하기까지 합니다. 역사란 참으로 아이러니한 학문입니다.출신은 미상, 그러나 게르만인임은 분명하다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시대의 주역은 라틴인에서 게르만인으로 넘어갑니다. 알라리크, 겐세리크 등

  • 로마를 포위한 남자!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

    로마를 포위한 남자!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테오도시우스 대제 이후 역사 교과서에 이름을 남기는 로마 황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같은 시기 게르만 족장들의 이름은 꽤 많이 등장한다.그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 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 훗날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의 기초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번 글의 주인공 알라리크도 바로 그런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서고트족의 초대 국왕(Rex)으로, 서고트족은 이후 스페인을 지배하며 오늘날 스페인의 뿌리가 되었다.스틸리코와의 삼각 구도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은 로마군에 편

  • 『로마 황제 열전』을 쓴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트란퀼루스

    로마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수에토니우스가 남긴 『로마 황제 열전』은 로마사를 연구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사료로 꼽힙니다. 이 책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부터 도미티아누스까지 12명의 황제가 등장합니다. 수에토니우스 본인은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부터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걸쳐 활동한 인물입니다. 자신이 살던 시대보다 앞선 역사를 다루다 보니 서술에 고소설적인 색채가 짙고, 오늘날에는 그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 영향으로 수에토니우스 때문에 억울하게 평가받게 된 황제

  • 고대 로마 최고의 역사가 타키투스 — 그의 기록으로 로마사를 읽다

    오늘날 우리가 로마사라 불러온 역사 서술 가운데,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부터 황제 통치 초기에 이르는 시기의 기록은 상당 부분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의 저술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타키투스는 당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으며,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로마 제정 초기의 역사를 이해하게 됩니다. 원로원 의원이었던 타키투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역사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지만, 정작 타키투스 자신의 출생과 배경은 수수께끼에 싸여 있습니다. 특히 그의 출생에 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소아시아(오늘날 터키

  • 로마 공화정의 영광의 길, '쿠르수스 호노룸'이란 무엇일까?

    로마 공화정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국정은 원로원의 자문을 받아 임기 1년의 두 집정관(콘술)이 중심이 되어 운영해 나갔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집정관을 비롯한 대다수의 요직이 무보수로 수행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집정관에 이르기까지의 승진 과정은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 즉 명예의 코스라 불리며 크나큰 영광으로 여겨졌습니다. 로마판 명문 출세 코스 그렇다면 현대 일본에서 쿠르수스 호노룸에 가장 가까운 것은 무엇일까요? 도쿄대학 법학부를 나와 관료가 되어 차관까지 오르는 코스일까요, 아니면 정치인이 되어 총리

  • 911년~1204년: 바이킹에서 노르만인으로, 노르망디의 역사

    911년: 단순왕 샤를, 노르망디를 바이킹에게 할양하다롤로(Rollo)와 그의 무리는 노르웨이나 덴마크 등 북유럽 출신으로, 새로운 땅을 갈구하던 바이킹들이었다. 911년, 그들은 샤르트르(Chartres) 성을 공격했으나 네우스트리아 변경백 로베르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긴장을 완화하고 적대적인 위협으로 여겨지던 바이킹들을 왕국 안으로 통합하기 위해, 서프랑크의 국왕 샤를 3세(단순왕)는 롤로에게 오늘날의 노르망디(Normandy)에 해당하는 영토를 하사했다.그 대가로 롤로는 프랑크 왕국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고, 기독교로 개

  • 936년~1291년: 신성 로마 제국의 흥망사

    936년: 오토 1세, 독일 국왕으로 선출되다오토 1세는 매 사냥을 열렬히 즐겼다는 이유로 매잡이 하인리히(Heinrich der Vogler)라 불린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이었다. 그는 세습권에 따라 독일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이로써 하나의 위대한 왕조가 탄생하게 된다.955년: 레히펠트 전투오토 1세는 레히펠트에서 벌어진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패배한 마자르족은 이후 동유럽 방면으로의 약탈을 중단하고 다뉴브 평원에 정착하게 되었다.962년 2월 2일: 오토 황제 대관식교황 요한 12세는 오토 1세에게 신성

  • 790년~1100년, 바이킹의 시대: 습격에서 정착까지

    바이킹의 일상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 출신 민족으로, 오늘날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이들 다수는 농부, 장인 또는 어부였으며, 여러 가족이 족장 소유의 길고 넓은 공동 주택에서 함께 생활하며 일하고 먹고 자는 공동체 문화를 이루었습니다.그러나 바이킹은 흔히 반은 해적, 반은 상인으로 정의됩니다. 바이킹(Viking)이라는 단어는 약탈 원정을 뜻하는 표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행진하는 곳마다 공포와 죽음을 퍼뜨리는 무시무시한 전사로 그려집니다.노르드 신앙바이킹들은 전장에서 전사한 용사들이 신 오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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